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이 안에선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201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 이 영화를 단순한 사회 풍자 코미디로만 보셨다면, 놓친 게 많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현대 미술계를 둘러싼 가장 첨예한 이론적 논쟁을 영화적 언어로 번역한 놀라운 메타-비평입니다.
관계 미학이라는 아름다운 환상
영화 속 전시작 ‘더 스퀘어’를 기억하시나요? 바닥에 그어진 하얀 사각형과 그 옆의 설명문. 이것이 바로 프랑스 미술 이론가 니콜라 부리오가 1990년대에 제시한 관계 미학(Relational Aesthetics)의 완벽한 사례입니다.

부리오는 현대 미술이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대화, 상호작용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갤러리는 작은 유토피아, 즉 ‘마이크로토피아’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듣기에는 참 아름답지 않나요?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세요. ‘더 스퀘어’ 전시장은 항상 텅 비어 있습니다. 작품이 약속하는 신뢰와 배려는 어디에도 없고, 관객들은 그냥 지나쳐 갑니다. 왜 그럴까요?
클레어 비숍의 날카로운 지적

영국의 미술 비평가 클레어 비숍은 일찍이 관계 미학의 한계를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녀의 핵심 비판은 이것입니다:
모든 대화가 선한 것은 아니다. 갈등과 불편함이 없는 관계는 오히려 기존 권력 구조를 숨길뿐이다.
영화 속 주인공 크리스티안을 보세요. 겉으로는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큐레이터지만:
- 이민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의심하고
-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여성을 대상화하며
- 어린아이의 정당한 사과 요구마저 회피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숍이 경고한 ‘동질적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엘리트들이고, 이들 사이의 ‘조화로운 소통’은 사실 기득권의 안전한 담합일 뿐입니다.
적대성이 필요한 이유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비숍은 적대성(antagonism)이 답이라고 말합니다. 불편함과 갈등을 통해서만 진정한 민주적 공론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거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바로 여기서 등장합니다. ‘더 스퀘어’ 홍보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 동영상 - 어린 소녀가 폭발하는 충격적인 광고 말이죠.

이 사건은 의도치 않게 비숍이 제시한 ‘적대적 관계 미학’의 완벽한 사례가 됩니다:
- 평온한 미술관 공간에 실제적 갈등을 도입하고
- 미술계의 상업적 논리와 윤리적 가치 사이의 모순을 폭로하며
- 큐레이터와 기관의 책임 문제를 제기합니다
갑자기 모든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죠. 진짜 ’ 공중(public)’이 형성되는 순간입니다.
산티아고 시에라의 불편한 진실
비숍이 옹호하는 작가 중 하나가 산티아고 시에라입니다. 이 스페인 작가는 관계 미학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체첸 난민들을 박스 안에 숨겨놓고 관객들이 그들을 ‘구경’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불편하죠?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을 통해 우리는 난민 문제와 사회적 배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부리오의 조화로운 대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훨씬 더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죠.
위선을 벗겨내는 영화의 힘
《더 스퀘어》의 진짜 힘은 이런 이론적 논쟁을 일반 관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예술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기득권층의 자기만족일 뿐일까요?
크리스티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는 현대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목격합니다. 입으로는 평등과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 말이죠.
결국 남는 것
영화 마지막에 ‘더 스퀘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채로요. 이것은 실패일까요, 아니면 현실에 대한 정직한 고백일까요?
클레어 비숍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진단입니다. 갈등을 회피하고 피상적 소통만을 추구하는 관계 미학의 필연적 귀결이죠.
진정한 변화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고, 기존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적대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더 스퀘어》는 바로 그 불편한 거울을 우리 앞에 들이밀고 있습니다.
다음에 미술관에 가시게 되면, 한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과연 그곳에서 진정한 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안전한 동질성의 확인만 반복되고 있는지 말이죠.